제목: 옥합을 깨트린 마리아
성경: 요한복음 12장1~8절
설교: 고영렬 목사
일시: 2015년 8월 23일(일) 11:00
장소: 영동교회
서론
현대를 후기 산업사회, 혹은 포스트 포스트 모던 사회라고 합니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하나님 존재의 부정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인간의 인권이 강조되고 개인의 존엄이 강조되는 때도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요즘처럼 잔혹한 범죄가 난무하고, 인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자살이 만연한 시대도 없었습니다. 개인의 인권이 최고조에 달한 대한민국에서 어찌 보면 개인의 인권을 스스로 말살하는 행위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질까요. 저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신 부재의 사회, 즉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물질 중심, 인간중심 사회 결과가 이제 그 끝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돈의 신을 섬기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이 인간 생명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도 자꾸 세상을 닮아 갑니다. 말씀 중심 보다는 행사 중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강조하기 보다는 어떤 프로그램 중심, 성도간의 인격적 교제 보다는 교인들의 숫자가 목사의 능력 평가 잣대가 되는 이상한 현상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제 후배 중에 하도 교인 숫자에 매달리는 목사가 있어서, 왜 그러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후배 왈, 목사는 교인 숫자로 평가 되는데 그것은 총회에 참석하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총회가면 개척교회 목사는 개척교회 목사들끼리 모여 교제하고, 100명 숫자 교회목사는 그들끼리, 500명 되는 교회 목사는 또 그들끼리 모여 교제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가치는 교인 숫자로 평가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큰 교회 담님이 되어 큰 교회 목사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는 것이죠. 세상과 하나 다를 바 없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신앙 인격이 아니라 성도의 숫자로 사람을 평가 한 것이죠.
본론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주님의 머리에 나드 향을 부은 사건을 보다 명백히 설명하기 위하여 요한은 사건의 시간, 장소, 등장인물을 보다 명백히 하였다. 유월절 엿새 전,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이다. 유대인들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를 준비한다. 그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양고기이다. 모세가 바로에게로부터 유대인을 해방 기키는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죽음의 신이 온 애급을 뒤 덥고 문설주에 양을 피를 바를 집은 “유월”한 사건, 즉 영어로는 “pass over"라 표현 일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이 돌아오면 양을 잡고, 온 가족이 양고기를 먹으면서, 출애굽을 기념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유월절 사건이 가진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월절에 양의 죽음이 유대인을 죽음에서 건져내는 도구가 되었다면, 예수의 죽음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요한에게는 이 사건은 참으로 생생한 기억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오늘 선택한 본문을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부분에 배치 한 것과 달리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님을 위한 잔치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11장에서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 많은 이들이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게 되고, 질투심에 사로잡힌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 이후에 이 사건이 일어났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이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보다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요한은 그 사건이 벌어질 때에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자 있었고, 마르다는 집안 일로 바쁘게 움직였다. 이 사선에서 요한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옥함을 깨트린 여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지만, 요한은 마이아 라고, 그것도 나사로의 누이 중 하나인 마리아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기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고 경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마가와 누가 복음서는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전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요한과 달리 마태는 요한과 같은 주님의 제자 이었지만 요한처럼 가까이서 주님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동생이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은 마리아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자신의 미래가 담보된 나드 향으로 주님을 발을 씻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손님을 초대하면 깨끗한 물로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물 대신 자신 소유의 전부인 한근의 나드 향으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유대인 여인들은 결혼위한 준비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나드 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을 위한 지참금으로 옥함에 보관하고 있다가 결혼 하면서 가져가는 최상의 예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발을 씻는 도구로 사용 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 최고의 존경과 신뢰를 받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이다. 개신교 역사에서 부흥의 역사를 이끌었던 사람 중에 디엘 무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전도자 이전엔 무명의 구두 수선공으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헌신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대단한 학적인 능력이나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했던 것은 전적으로 주님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한 집회에서 이런 요청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모든 것을 받치는 자를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는 이야기와 집회에 참석하는 자들에게 주님에게 전적인 헌신을 결심하는 요청 이었습니다. 무디는 그 요청에 응답 하였고, 그 이후 그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 하였습니다. 그는 대서양을 오가면 많은 이들을 주님에게 이끌었고 지금도 시카고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세운 신학교와 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을 쓰십니다. 99.9%을 헌신한 사람이 아니라 전부, 100%을 헌신한 사람을 쓰십니다. 만을 99.9%을 헌신하고 0.1%을 헌신하지 않는 다면 이는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입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본문은 가롯 유다 만을 문제 삼고 있지만 사실 유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있는 모든 제자들의 마음도 같았을 겁니다. 그 비싼 향유를 발 씻는 물 대신 허비 했다는 생각입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 합리적인 사고가 필요 합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성도들은 불필요한 낭비를 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재원을 효율적으로 적제 적소에 사용 하는 것은 교회나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또한 잘못입니다. 조금은 지성인 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유혹이 고상한 신앙생활이라는 유혹입니다. 적당한 신앙생활, 스스로 세운 기준에 따라 고상한 신앙생활을 영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 할 때에 어떤 친구가 그런 유혹을 저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광신자들이 많은 교회야 그러니 적당히 신앙생활 하고, 예쁜 여학생 하나 만나 교회 다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최선이야! 얼마 후 그 친구는 교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어떤 기업가가 이천억 원을 통일운동에 기부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사회적인 약자나, 공익을 위하여 물질을 기부하는 것은 국가 공동체를 위하여 참으로 잘 한 일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최고의 선행일 것입니다. 자신을 욕망을 위해서 쓰거나, 자손들에게 물려주어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을 재산을 사회적인 일에 쓴다는 일에 모든 이들이 칭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의 관심은 돈을 어떻게 사용 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구제 사업에 사용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을 위하여 쓰는 선택을 하였고 그 것이 제자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주님이 거부 했다고 오해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교회의 역할을 선교와 구제로 규정 하고 있습니다. 구제는 교회의 역할에서 참으로 중요 합니다. 그렇지만 우선순위에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일과 구제사역과 충돌이 일어난다면 성도는 주님을 섬기는 일이 우선 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6절은 유다의 태도에 대한 요한의 해석입니다. 유다의 행동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율법을 숭배하여 그 기준에 따라 타인을 판단하며, 정작 자신은 그 율법으로만 거룩해지는 간편한 신앙생활은, 영원한 하나님이 아닌 작은 억압에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악한 내면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렝돈 길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주님의 반응입니다. 칠, 팔절이 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첫째,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가 자신의 죽음을 위한 준비로 이해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빨리 부패하지 않도록 향을 바르고 방부제를 사용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명,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분명히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인격과 메시아로서의 행동에 매료되어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렸지만 이 행위는 결국 주님의 전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에 귀하게 사용 된 것입니다. 둘째, 마리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투자 한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 돈을 사용 했다면 마리아는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과 감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로 씻는 행위는 돈을 허비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한편으로는 천박한 행위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는 보이는 것들,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것이었고, 당장의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투자한 행위 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주님은 이 행위를 널리 알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성경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 오늘 저는 여러분과 나누고 있습니다.
결론
이야기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첫째, 옥함을 깨트린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저는 세 가지 정도를 강조 하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적당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99.9% 신뢰하고 0.1% 신뢰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의 가장 고상한 척한 행동, 도덕적, 윤리적 고상한 행동과 신앙생활은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가치 체계가 너무 달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셋째, 마리아의 행동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투자한 것입니다. 성도는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 사람들이 무시한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 전부를 던지는 참으로 무모한 사람입니다.